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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명창 김창환(金昌煥)

백지[白紙] 2014. 12. 14. 22:41

김창환(金昌煥,1854 ∼1927)

이날치정창업()에게 판소리를 사사한 그는 서편제 판소리의 마지막 대가라고 인정받을 만큼 소리를 잘했을 뿐 아니라 좋은 풍채를 가지고 연기력도 능숙하였다. 어전(殿)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불러 고종의 총애를 얻어 정6품에 해당하는 의관()을 제수 받았고, 너름새발림이 창보다 더욱 능통한 명창이었다.

1900년대 한양과 지방의 잔치에서 초청됐을 뿐 아니라, 1908년부터 원각사() 시절 창극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2년(광무 6) 고종황제의 등극 40돌을 기념하는 칭경예식() 때 쓰려고 서대문 안에 건립된 원각사(당시에는 협률사라 불렀음)라는 현대식 극장에서의 공연이 콜레라 때문에 그리고 이듬해(1903)는 흉년 때문에 지연되자, 협률사에서 판소리·잡가·무용 등의 종목들로 일반 대중공연을 진행하게 됐다. 그때 김창환은 송만갑·이동백·염덕준 등과 함께 판소리를 새로운 형태로 만든 창극()을 시도하였다.

1905년 배우조합을 조직하고 전국의 유명한 소리광대를 모집했다. 총지휘는 김창환이 맡았고, 조합장은 명고수 강재옥이 맡았으며, 배우는 송만갑·이동백·염덕준 등이었다. 원각사 무대에 오른 창극 춘향전 공연 때 춘향 역은 심명언, 월매 역은 신갑도, 도창은 김창환, 이도령 역은 최득이, 방자 역은 김봉이가 맡아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1908년( 2) 12월 1일 원각사에서 "은세계"() 공연 때 창부()로 출연하였다.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그가 조직한 김창환협률사()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강용환·유성준·김채만 등 50여 명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상도 남해()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1913년 3월 장안사()에서 흥행하는 구연극()에 송만갑 명창 및 채란 등과 출연하였다. 1915년에 설립된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선생이었던 그는 조합장은 강경수, 부조합장은 김인호김봉이, 총무는 조진영박상도, 회계는 강원삼, 사무는 윤병두, 평의원은 곽천희·김기봉·김봉문 등 총 30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가정박람회 때 출연하였다.

1915년 9월 이동백 등과 함께 유성기음반에 취입했고, 그가 부른 춘향가와 "흥부 가난타령"은 미국 빅타사의 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적벽가는 일축()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가 취입한 춘향전의 "과거보는데"와 단가 "고고텬변"() 등 여러 눈대목은 일축()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남도잡가()의 "농부가"·"성주푸리" 및 흥부전의 "중타령" 등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1923년 7월 9일 동정음악회가 천도교회당에서 열렸을 때 김영환(최동준(홍난파()와 함께 출연했고, 1926년 11월 21일 광무대에서 열린 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28년 "제비노정기"를 레코드에 취입했다. 1930년 9월 15일에 열린 팔도명창대회 때, 1931년 9월 21~23일 제2회 팔도명창대회 때, 1932년 7월 8일 경성음률협회() 주최 전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28년 "제비노정기"를 레코드에 취입했고, 그가 한성준의 반주로 취입한 남도잡가·"강남행"() 등 여러 곡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1928~1932년 한성준의 반주로 남도단가()·"농부가" 등 여러 곡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춘향가·심청가를 방송했으며. 제자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정광수()가 있다.

1930년 9월 27일 조선음률협회()가 창립됐을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의 제2회 공연이 열렸을 때 출연해 춘향전 중 "춘당시과"()와 단가 "죽장망혜"()를 공연했다. 1932년 1월 22일 조선악정회() 창립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2년 1월 23일 악정회() 창립 때 정정렬·오태석·한성준 등과 함께 발기했다. 1932년 6월 22일 조선음률협회의 제3회 공연 때 "죽장망혜"와 "박타령"을 공연하였다. 1930년 11월 마지막 무대에 출연했으며, 1934년 향년 85세로 사망하였다.

춘향가·심청가·흥보가에 뛰어났고, 특히 "제비노정기"가 그의 장기였다. 그의 더늠인 "제비노정기" 사설은 정노식()의 『』에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환 [金昌煥]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1854(철종 5)∼1927. 전라남도 나주 출생. 명창이었던 이날치()·박기홍()과는 이종간이다. 어려서부터 함평에서 서편제(西便)의 명창인 정창업()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08년 7월 원각사가 설치되자 주석()으로 있으면서 많은 가객들을 거느리고 창극을 공연하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 벼슬을 제수받았다. 1909년 11월 원각사가 폐쇄되자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전라도 출신의 명인 및 명창을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기자 방성통곡하고 경상남도 남해에서 협률사를 해산하여 단원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9년 고종이 죽자 고향집에서 후원에 사당을 신축하여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근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74세로 죽었다.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고 그 이전 명창들의 법제()에 대한 견문도 많았다. 또한, 소리는 서편제인 만큼 애원처절()하여 감상적인 계면조를 주로 한 판소리를 했으며,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하여 관중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소리는 오수암()·김봉학()·조몽실()에게 이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정광수()가 「춘향가」와 「흥보가」를 이어받고 있다.

판소리 중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집터 닦는 대목’, 「춘향가」중 ‘과거장’, 그 밖에 「농부가」와 「성주풀이」가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이 음반은 서편제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환 [金昌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나주 소리꾼 김창환

김창환은 우리가 그 소리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근대 오명창의 맨 선배격인 분이다.

『조선창극사』에는 김창환의 특징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이날치 이래 서편제의 독보적인 명창이라는 점, 둘째로 새로운 소리를 작곡한 뛰어난 작곡가라는 점, 셋째, 소리뿐 아니라 연기에 특히 뛰어난 예능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명창 임방울 김창환의 조카, 이날치, 박기홍과는 이종간

김창환은 1854년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삼도면은 현재 광주 광역시 광산구 내산동 대봉마을 근처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에서 태어났다. 나주평야의 너른 들이 그를 키운 토양인 셈이다.

김창환의 부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집안은 판소리의 내력이 깊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이날치와 이종간이면서 동편제 명창이자 이론가인 박기홍과도 이종간이다.

또한 송정리 출신인 명창 임방울(김창환이 살던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은 그의 조카이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건데 김창환의 어머니 쪽이 판소리의 내력과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박기홍과 이날치, 김창환이 이종간이므로 세 명창의 어머니들은 서로 자매지간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 명창의 어머니계가 전통음악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임방울의 외숙이 김창환이다. 김창환의 누나가 임방울의 어머니이다.

김창환은 정창업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원각사에서 공연한 춘향전이 성황을 이루자 심청전을 각색하여 창극화하였는데, 이 작품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은 현상에 고무되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최병두타령'울 다시 창극화하여 공연하였다.

'최병두타령'의 줄거리는 탐관오리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 고을의 부자인 최병두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내용이다. 아무 죄가 없고 착한 최병두는 곤장으로 죽고 그의 많은 재산을 정 감사가 몰수하여 착복하였다. 이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한 판소리가 바로 '최병두타령'이다.

최병두가 억울하게 죽자 그 자손들이 돈 1만냥을 마련하여 당시 세도가 당당했던 개화파 김옥균을 찾아가서 최병두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도록 탄원하였다. 김옥균은 그 돈을 원각사에 기증하고, 판소리 '최병두타령'을 지어 널리 부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최병두타령'이 다시 창극으로 만들어졌는데, 김창환이 최병두 역을 맡아서 열연하였다. 최병두의 역을 맡은 김창환이 수십대의 곤장을 맞아 죽어나오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김창환의 목에 엽전꾸러미를 걸어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각사는 3년간 창극의 무대가 되어오다가 없어지며, 1905년경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여기서 활약하던 소리꾼들의 활로가 막히게 되었다. 그래서 김창환은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창극단인 협률사를 조직하여 전국을 누비며 공연을 하게 되었다.

협률사는 우리 국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악공연 전문단체로 초창기에는 김창환이 조직한 것과 송만갑이 조직한 두 개의 협률사가 있었다.

김창환의 협률사의 인기가 대단하여 이 단체가 지방공연을 갈 때면 그곳 주민들이 말로만 듣던 국창 김창환과 그 일행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협률사 공연지를 찾아 이동할 때의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김창환은 사인교 위에 위엄 있게 올라앉아 있고, 창극무대 구성에 재능을 가지 강용환과 김채만, 유성준 등이 나귀를 탔으며, 그 밖의 단원들도 울긋불긋 아름답고 단장한 우마차에 의관을 차렵입고 앉았다.

그리고 종사원들은 그 곁에서 걸어서 이동하였다.


나라 망하자 나주로 돌아와 제자 양성

행렬의 맨 앞에는 꽹과리, 징, 장구, 새납 등 풍물잡이들이 흥과 위엄을 돋우었다.

다음 공연지로의 이동거리는 멀어야 삼사십리 정도였고, 한 마을에서 보통 사흘-닷새 공연을 하면 마을 전체가 협률사 공연 구경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김창환의 협률사는 동대문 근처에 상설극장을 새로 지어 '동대문협률사'라고 고쳐 개관했는데, 이때부터 송만갑, 이동백, 유공열, 하성준, 허금파, 강소향 등이 고정 출연자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합방을 이루면서 '동대문협률사'와 '송만갑협률사'가 문을 닫게 된다.

일제는 협률사 공연이 국민들에게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전통예술을 통해 한국인의 동질성을 강조한다는 판단 아래 협률사의 해체를 명했다. 지방공연을 하던 중에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창환은 고향인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의 절골로 돌아와 은거하며 울분을 달랬다.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그에게 나라를 잃은 슬픔이란 그 도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 고종이 죽자 그는 동네 뒷산에 사당을 지어 고종의 영정을 모셔놓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배알하였다고 한다.

1925년경에 김창환은 공산출신인 정광수를 제자로 삼아 4년간 가르친다. 그리고 조카인 임방울을 이 해에 전국명창대회를 통해 데뷔시킨다. 이때 임방울이 부른 소리가 그 유명한 '쑥대머리'이다.

 

고종의 부름 받아 어전에서 소리

김창환 소리의 대명사 격으로 「제비노정기」를 들 수 있다.
이 더늠은 그가 고쳐 만든 대표적인 작품으로 김창환 소리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제비노정기」는 사설도 잘 지어졌으며, 곡조도 잘 짜여서, 기왕의 동편제 명창들도 〈흥보가〉가운데 「제비노정기」만은 김창환이 새로 짠 이 대목을 택하여 부를 만큼 인기있는 더늠이 되었다.
 
김창환은 특히 발림의 능력이 뛰어났고 전한다.
발림은 연극적 동작을 의미한다.

그이는 용모가 수려한 귀골형이어서 무대에 서면 청중들을 압도하였다. 그의 소리는 부드럽고 섬세하며 세공이 담긴 전형적인 서편소리이다. 그러나 유성기 음반으로 전해지는 그의 소리를 들어보면 지나치게 비장한쪽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느낌이 강하게 소리하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김창환은 19세기 말경에 한성에 올라와서 이름을 드날렸다.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를 한 적이 많아서 특히 〈어전광대〉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고종의로부터 명예직으로 의관을 제수 받았다.

19세기말은 우리의 역사에서도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던 시기였다. 제국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력으로 갱생을 도모하기 위하여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김창환이 활약하던 시기의 판소리는 그래서 기존 판소리의 바탕과는 사뭇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 41년 (1902년)가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세운 극장이 원각사이다.

조정에서는 이 경축행사를 위해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국창으로 대접받던 김창환에게 칙명을 내려 전국의 국창을 불러 모아 공연하도록 하였다. 그때 모였던 중심인물들로는 주석인 김창환을 비롯, 송만갑 · 이동백 · 강용환 · 김채만 · 유공열 · 염덕준 · 장자백 · 송옥봉 · 유성준 · 한경석 · 허금파 · 강소향 등이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김창환은 원각사를 거점으로 송만갑, 이동백과 판소리의 창극화를 완성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공연무대 원각사 실질적 운영자

원각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상설 공연무대로서, 그 구조는 널찍한 무대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 옆으로 잡아당기면서 열고 닫는 수동식 무대막, 공연준비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김창환은 원각사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되어 판소리와 창극의 보급에 기여한다. 김창환은 국악공연단체인 협률사를 조직하여 주로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는데 협률사의 운영은 궁내부에서 적접 관장하였다.
 
판소리의 연희공간이 서양식 극장으로 옮겨오면서 판소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마당소리’와 ‘방안소리’라는 특징이 다시 ‘극장 소리’에 걸맞게 조절되었으며, 이같은 현상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 것이 바로 창극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창극화 작업은 강용환이 주도하였다.
 
종래 한사람이 부르던 전통적인 판소리를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누어 부르게 하고 거기다가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창극은 당대의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처음 원각사에서 공연한 창극의 제목은 〈춘향전〉이었고, 입장료가 상당히 비쌌는데도 2천명 수용의 극장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기였다고 전한다.

정창업은 서편제 소리의 귀재로서 184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정창업은 음악을 하는 집안으로 추정되는데, 어려서부터 남도소리에 소질을 보였다.

그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전주대사습에 참가하여 <춘향가>가운데 “저 방자 분부 듣고 나귀안장을 짓는다. 나귀 안장 지을 적에 나귀등에 솔질을 솰솰...”대목을 부르다가 그만 사설을 잊어버렸다는 에피소드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 후 3년간 절치부심하여 드디어 명창으로 소문이 나고, 드디어 19세기 후반에는 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그 해는 대원군의 10년 세도 마지막 해로서 정창업이 운현궁의 마지막 가객이었다고 전한다.

그 후에 정창업은 나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한 것을 알려져 있다. 정창업의 더늠으로 <중타령>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중타령은 원래 무가에 있었는데, 판소리에 삽입되어 불리게 되었다.

 

1925년경 김창환은 공산출신인 국창 정광수를 제자로 삼아 4년간 가르친다.

그리고 조카인 임방울을 그해에 전국명창대회를 통하여 데뷔시킨다. 이때 임방울이 부른 소리가 그 유명한 '쑥대머리'이다.

김창환은 후기 오명창 중에서 나위가 가장 위다. 그의 소리는 고제로 요즘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신제 판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고제 소리의 마지막 명창이라 이를 만하다.

 

그는 '춘향가'와 '흥부가', '수궁가'를 특히 잘했으며, 그의 취입음반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10종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김창환은 1930년대 중반에도 공연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든 살을 넘겨 살았다.

김창환의 아들은 김봉학과 김봉이 두 사람이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다.

배다른 형제인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안 좋았다고 전한다. 김창환은 적실 소생인 김봉학을 특히 귀여워하고 자신의 소리를 이어갈 사람으로 꼽았다. 김봉학은 키가 컸으며 풍모가 잘생겼다고 한다. 김창환은 아들인 김봉학이 그의 소릿제를 똑같이 잘한다면서 그의 소리를 고스란히 이을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학은 김창환 명창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학사와 단성사에서 공연하였으며, 주사벼슬을 하사받았다 한다. 김창환이 창극활동을 하다가 한일합병 이후 나주에 은거하자 김봉학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고향인 나주로 내려왔다.

김창환이 노령으로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김봉학이 대신 소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정광수가 17살 때 나주 삼도면 양화리의 김창환 문하로 들어왔을 때 그곳에는 오수암, 성원목, 강남중, 임기창 등이 들어와 김봉학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환의 집 안쪽에 소리를 가르치는 소리채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김창환이 노쇠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김봉학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광수도 김봉학에게 주로 김창환이 보유한 서편제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를 배웠다.

김봉학은 엄격하고 무섭게 가르쳤다. 가끔 김창환이 소리공부하는 자리에 들러서 소리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일러주면서 칭찬을 해주고 내려갔다고 정광수는 기억한다. 그런데 김봉학은 아편을 자주하여 정광수도 가끔 심부름으로 쌀 몇 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비싼 아편을 사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봉학은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김창환의 또 다른 아들인 김봉이는 후처 소생으로 풍채가 크고 미남으로 잘생겼다고 한다.

 

정광수 명창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소리는 목에 광이 났으며 성량이 크고 윤택했다고 한다. 내지르는 소리가 5리는 갈 정도로 목이 좋은 명창이었다.

통성으로 질러내는 우람한 소리가 특징인 그는 목이 좋아서 맛있는 가락을 구사하였는데, 슬픈 대목을 할 때면 관중이 모두 울었다고 전한다.

김창환은 서자인 김봉이를 박대하여 집을 나가 다른 곳에서 소리 공부를 하였다. 김봉이 소리에 대하여 불만이었던 김창환은 김봉이가 소리를 할 때면 "등에 붙일 놈 배에 붙이고, 배에 붙일 놈 등에 붙인다"고 비평했다고 한다.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이가 협률사를 꾸며 김천에 체류할 때 그는 오수암과 함께 그의 공연을 봤다고 한다. 이때 김정문 협률사도 김천에 와 있어서 두 협률사가 합동공연을 했다고 한다.

먼저 김정문패의 공연에서 조산옥, 김녹주 등 쟁쟁한 명창들이 장고를 메고 나와서 잡가를 한 다음 김정문이 나와서 소리를 하여 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김봉이패가 나와서 '화초사거리'를 여자들보다 더 좋은 목으로 더 멋지고 목을 잘 써서 불러 박수갈채가 대단하였다.

김봉이의 유성기 음반이 신나라음반의 자료실에서 공개되었다. 김봉이의 소리는 두툼하여 아버지인 김창환의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옛 명창들의 자료는 발굴되는 대로 새롭게 검토되어야 하지만 김봉이의 음반의 경우는 부자 2대에 걸친 뛰어난 명창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김봉이의 자료가 전무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일이 되었다.

김봉이는 공산면에서 살았으며 형인 김봉학처럼 아편을 즐겨 젊은 나이에 죽었다.  -끝- 

 

 

출처: 나주투데이 신광재 기자(http://www.na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