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렬(丁貞烈, 1876년 ~ 1938년. 고종 13)
7세 때 한 마을에 사는 정창업(丁昌業)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한 정정렬은 14세 때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이날치(李捺致)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나 이날치도 16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정정렬은 익산 신곡사(神谷寺)와 충남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로 옮겨가 거기서 소리공부를 했다. 그 후 공주(公州) 갑사(甲寺)에서 40세까지 공부를 계속했으며, 한때 마산(馬山)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50세 때인 1926에 상경한 정정렬은 송만갑·이동백·김창룡과 친교를 맺었다. 그들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후진양성에 노력하면서 창극활동을 전개했고, 또한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였다.
춘향가에 뛰어난 그의 더늠은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춘향가와 적벽가에 뛰어난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신관 사또 도임"이다. 상경해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의 명창과 친교를 맺은 그의 문하에 장안 명기와 연소한 소리꾼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원각사(圓覺社) 시절 김창환·송만갑·이동백·김창룡을 비롯해 이화중선·김초향·김추월·신금홍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0년 9월 15일에 열린 팔도명창대회 때 출연했으며, 1930년과 1931년 팔도명창대회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제2회 공연 때 단가 "편시춘"(片時春)과 "불수빈"(不須鬢)을 공연했으며, 9월 21~23일 제2회 팔도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0~1939년 "강상가"(江上歌)·"강상(江上)에 둥둥"·"광한루 경개"(廣寒樓景槪) 등의 단가와 판소리 눈대목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했고, 경성방송국에서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를 방송했다.
1932년 1월 22일 조선악정회(朝鮮樂正會) 창립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2년 6월 22일 조선음률협회의 제3회 공연 때, "강산풍월"(江山風月)과 "박석틔"를 공연하였다. 1933년 2월 25일 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했고, 1933년 8월 20일 조선음악학원(朝鮮音樂學院) 설립을 위한 「전통악과 무용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34년 3월 3일 조선정악대회(朝鮮正樂大會) 때, 1935년 11월 27~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추동명창대회 때, 그리고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4년 5월 11일 그는 이동백·강태홍·김동강·김용승·김종기·김창룡·김채련·박녹주·송만갑·심상건·오태석·한성준, 이상의 발기인과 함께 1934년 4월 24일에 설립한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구회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최로 개최한 1936년 2월 9~11일 가극(歌劇) 배비장전 공연 때, 그는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과 함께 출연했고, 4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창립기념공연으로 동양극장의 무대에 올린 창극(唱劇) 흥보전을 편곡했고, 오태석(흥보)·박녹주(흥보처)·정남희(놀보)·임소향(놀보처)·조상선(마당쇠) 등을 출연시켰다.
1936년 6월 8~11일 연쇄창극(連鎖唱劇) 유충렬전 공연 때, 9월 15~16일, 25일 가극 춘향전 공연 때, 10월 28일 가극 흥부전 공연 때, 12월 15~20일 가극 심청전 공연 때 심봉사로 출연했고, 1937년 2월 26~3월 2일 전승의 맥이 끊어진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을 작창하여 무대에 올린 그는 숙영낭자전을 박녹주(朴綠珠)·이기근(李基根)·김여란(金如蘭)에게 전승시켰다.
1937년 1월 3일 "명창에게 들은 생사"라는 제목 아래에 게재된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 이상 네 명창의 대담록이 전한다. 1937년 5월 20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제4회 정기총회 때 상무이사로 선출됐고, 6월 21~25일 동양극장에서 공연되는 가극 편시춘 공연 때 연출하였다. 1937년 6월 11일 빅타 축음기회사가 춘향전 전편(全篇)을 취입할 때 이화중선·박녹주·임방울 등과 함께 취입하였다.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찬조 출연했고,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로는 김연수·박녹주·김여란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강남홍(江南紅)을 만나다"·"기생점고"·"난향(蘭香)이 춘향의 훼절(毁節)을 강권(强勸)" 등의 춘향가 눈대목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한성준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강상풍월"(江上風月)·"광한루"(廣寒樓)·"기생점고"·"농부가"를 포함한 20여 곡의 단가와 판소리의 눈대목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몽중가"·심청전전집·"자탄가"·창극 춘향가·화용도전집은 폴리돌음반에 전하고, 그가 김오케고악단·오케효과단 반주로 취입한 "광한루잔채(잔치)"·"군로사령"·"기생점고"를 포함한 춘향가의 여러 눈대목은 오케음반에 전하며, 그가 취입한 춘향전의 "오리정 이별"은 군소회사음반에 전한다.
정정렬 관련 기사는 『三千里』(1934) 6권 7호·『三千里』(1935) 7권 10호·『朝光』(1937) 17호·『朝光』(1938) 31호·『朝光』(1938) 31호 등에 나온다.
그의 영결식(永訣式)은 1938년 3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관에서 거행됐으며, 그의 일대기가 당시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정렬 [丁貞烈]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정정렬의 판소리"
정정렬은 다른 소리도 잘했지만, 특히 <춘향가>로는 판을 압도해 버린다. 구제에 신제를 접목해 새롭게 만든 정정렬제 <춘향가>는 오늘날 <춘향가>의 기초가 되고 있다. 김소희, 박동진, 김연수 등이 정정렬제 <춘향가>를 기본으로 삼고 있어, 가히 현대 <춘향가>는 정정렬제 <춘향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정정렬제 <춘향가>는 소리뿐만 아니라 극적 구성과 사설의 표현이 뛰어나다. 기존의 주요 소리를 뺀 자리에 새로운 소리를 집어넣은 그의 소리는 독창적이며 음악적, 문학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
정정렬 명창의 육성이며 정정렬제 춘향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한국고음반연구회 및 한국퉁소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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