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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소리 기행 - 이동백, 김창룡, 심정순의 자취

백지[白紙] 2014. 12. 8. 22:59

 

 

『조선창극사』는 12인의 판소리 명창에 대해 “중고제, 중고조 또는 호걸제”라는 별도의 부기를 두어 소개하고 있다. 한송학을 필두로 김정근, 윤영석, 백점택, 이창원, 황호통, 박상도, 김충현, 김봉학, 김석창, 이동백, 김창룡에 이르기까지 중고제 명창으로 언급된 이들은 대부분 충청지역에서 태어났다. 또한 이들의 활동 기간을 따지면 한송학이 헌종시대에 태어났다고 언급한 바, 1800년대 중반부터 약 100여 년 간을 풍미한 셈이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조선창극사』의 판소리명창 89인 가운데 경기·충청 지역 출신은 22명이다. “중고제·호걸제는 염계달·김성옥의 법제를 계승하여 경기·충청간에서 대부분 유행한다”는 언급으로 볼 때, 경기·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고제 판소리는 - 출신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다소 기계적이며 자의적임을 감안하더라도 - 판소리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고제 판소리의 맥은 오늘날 판소리 가창자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며, 더욱이 중고제에 대한 학문적 접근 역시 소원하였던 것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다행히 유성기 음반에 남아있는 소리를 중심으로 중고제 판소리의 음악적 실체와 존재양상에 대한 연구가 근자에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중고제 판소리 명창들의 삶에 대해서『조선창극사』에 소개된 것 외에, 보다 구체적인 궤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이들은 이동백·김창룡·심정순 등이다. 100여년의 세월 남짓, 수만의 입에 회자되었던 이들의 자취를 찾아 길을 나섰다.

 

늠름한 풍채, 입신의 연기 이동백

 

이동백은 1866년 2월 초4일 충남 비인군 이방면 도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1937년 3월호 『조광』에 실린 이동백의 회고담에 의하면 태어나기 한 해 전에 부친이 별세하였고, 삼촌댁과 같이 머슴을 두고 농사짓고 살았다 한다. 또한 그의 집안에 대해 ‘충청도에서 청수, 전라도에서 집강, 경기도에서 대방을 지냈다’고 말했던 점과 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굿 기능보유자였던 이어인련(李於仁連, 1894-1986)이 6촌 여동생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집안은 무계(巫系)와 관련있는 창우집단의 가계로 추정된다. 청수는 고을 재인청(신청)의 총수이며 집강은 도단위 재인청의 서무직이고, 대방은 도단위 신청의 총수를 일컫는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천 IC를 나와서 좌회전, 4번 국도를 타고 부여방면으로 1.2km 정도를 가면, 고개 넘어 현대정유소를 지나 왼편으로 구환사 입구 표지판이 있다. 논 사이로 들어선 농로를 따라 800m 정도 가면 마을회관 앞 왼편으로 난 조그만 골목길이 있다. 이 길을 30여m 정도 오르면 ‘이동백선생 생가지(李東伯先生 生家址)’라는 표석이 보인다. 표석 왼편에 자리한 남루한 집이 이동백선생의 생가로,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 180번지가 현재의 주소이다. 이 집의 소유주는 김남수의 명의로 되어있고, 김남수의 외증조부(풍양조씨)가 이동백명창에게 집을 구입했던 것이다. 현재는 3칸으로된 본채의 왼편에 별채가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뒷집에 거주하고 있는 김남수의 누이 김춘자(50)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도만리 180번지는 본채 뒤편의 집과 우측(생가를 마주볼 때)의 기와집을 포함하여 본채를 중심으로 ‘ㄷ’자 모양의 규모있는 한옥이었다 한다. 현재의 모습은 본채의 맞은편 아래채는 헐렸고, 본채의 기둥은 당시 그대로이며 벽면과 지붕은 개량한 것이다. 여기저기 흠이 있고 기워내듯 막아선 집의 벽채는 답사자에게 오히려 정겨움을 준다. 천편일률의 초가삼간으로 복원된 생가에서 드는 공산품의 느낌보다는 당대를 풍미하다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져가는 옛사람의 내음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8·9세부터 서당에 입문하여 13세까지 한문을 공부하였던 이동백은 독서에는 뜻이 없고 가요에만 취미가 있어 15세 무렵에 글공부를 폐기하고 최상동, 김정근 문하에서 1개월간 수학한다. 이후 20세 전후에 마을의 뒤편에 위치한 흐리산 용구에서 2년간 독공하였고, 서산에 있는 김혜종에게 문견했다고 한다. 또한 이날치에게도 소리를 배웠다고 하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김혜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동백명창과 한성준명인의 1941년 좌담에서 “김세종 선생이 인제 길이 바로 잡혔으니 꼭 그대로만 나가라 하시며 아주 좋아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김혜종은 김세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창극사는 “김세종 문하에서 방향을 잡는다”(『조선창극사』212쪽, 동문선)라 기술하고 있다.

독공과 문견으로 소리길을 깨친 이동백은 25세경에 경기도로 이주하여 방황하다 다시 경상도로 옮겨가 진주 이곡사에 기거한다. 이동백이 진주에 기거한 시기를 경자년이라 술회한 바, 1900년에 해당한다. 또한 강원도 춘천 경무사(현, 경찰청장) 김정근의 집을 거쳐 창원, 마산, 김해, 부산, 동래, 함안 등을 거쳐 40세경에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으니, 이동백이 상경하여 서울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1904년경이다. 한편 『조선창극사』에는 35,6세 무렵 창원으로 가서 9년 간 거주하며 활동한 후 45,6세 경 상경하여 활동했다 하였고, 또한 연구자에 따라 지방에서의 활동과 상경시기는 10여년의 편차가 있다.

 

서울에서 이동백의 활동은 송만갑, 김창룡 등과 함께 한 왕성한 창극활동 및 판소리공연과 음반녹음이 주를 이룬다. 고종황제의 어전에서, 그리고 원각사·장안사·연흥사·광무대등의 무대를 누비며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등과 함께 창극활동의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또한 1908년 미국 Victor에서 발매한 ‘심청가 상·하편’과 적벽가 중 ‘조조가 관공에게 비는데’를 시작으로 잡가, 단가, 판소리, 창극 등 30여종이 넘는 음반을 녹음한다.
이동백은 1915년 경성구파배우조합, 1928년 조선음악협회, 1930년 조선음률협회, 1934년 조선악협회와 호성극단,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며 근대 판소리와 창극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세차례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조선 고래의 음률과 성악연구의 보급’이라는 설립취지에 준하여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연구와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창극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시기의 풍속과 문화를 재연하고, 옛소리의 고증을 통한 판소리와 창극의 복원과 재정비, 각색과 연출개념의 도입, 창과 대사의 다양한 표현방법연구, 무대장치의 대형화 등을 주도하며 각종 명창대회를 주최하고 수많은 창극을 공연한다.(백현미,『한국창극사연구』211∼234쪽)

 

당대를 풍미했던 이동백의 인기는 1939년 부민관 은퇴공연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늠늠한 풍채에 입신의 연기, 청중은 감격과 도취의 도를 넘어서 자아를 잃어버린 경지에 빠지었다”(1933년 3월 30일자 조선일보. 이규섭,『판소리 답사기행』63쪽)라고 언급한 기사내용은 『조선창극사』에 언급한 바대로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 쪽배에 앉아돌아갈 곳을 잊은 막연함’[有時乎 汪洋하여 萬里滄海에 扁舟一棹歸何處의 느낌]과 일맥상통하다. 부민관에서의 은퇴공연 후 지방의 귀명창들을 위하여 전국의 대도시를 한 달간 순회공연했다는 이동백의 인기는 훤칠한 풍모와 타고난 성음에 기인한 듯 싶다.『조선창극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장건한 체격은 당당한 위장부이다. 대하면 일종의 불가침할 위의(威儀)가 있는듯하다. 성음이 극히 미려하거니와, 그 각양각색의 목청은 들을 때마다 청신한 느낌을 준다. …(중략)… 혹은 골계로 사람을 웃기고 혹은 비곡으로 사람을 읏식하게 하는 데는 만당의 청중은 모두 흔취하며 …(하략).”

 

은퇴한 후에도 1941년까지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연과 1941년 ‘조선음악협회’, 1942년 ‘조선음악단’ 등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다 1950년 6월 6일 경기도 평택군 칠원리 새말에서 은거하다 85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상·하청을 고루 넘나들며 시원하게 구사하는 명창의 소리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멋을 담아 1900년대 초기부터 시작된 창극활동과 그 궤적을 같이하며 20세기 전반의 판소리를 이끌었다. 또한 김성옥-김정근으로 이어지는 중고제 소리의 명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동백의 소리를 통해 김씨 가문의 자취를 찾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이동백이 김정근에게 소리를 배운 기간이 동편제 명창 김세종에게 수학한 기간보다 훨씬 짧으며, 음반자료의 부족, 유사성을 찾기 어려운 춘향가 바디(배연형, “이동백 춘향가 연구”)등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동백의 판소리 계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더욱 조심스럽기도 하다.
독공터로 알려진 흐리산 용구를 찾아 1시간 여를 헤맸지만 수풀을 헤치고만 내려왔다. 마을을 지키는 노인들의 동행을 차마 부탁하기 어려워서였다는 핑계가 있다. 흐리산 중턱 바위아래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르며, 소리길을 찾아 수없이 이 길을 거닐었을 옛 명창을 생각한다. 아마 그는 고독과 좌절에 맞서며 매순간 하산을 생각하였으며, 수십·수백의 난고를 극복한 후에야 새타령과 삼고초려를 얻었을 것이다.
낮선 산중에 앉은 이의 귀에 새소리가 들어온다. 각색 비조는 아니지만, 100년을 상회하는 시간 그때도 이렇게 울었으리라. ‘너무 쉽게 얻고, 쉬이 얻은 얄팍함’에 대한 생각을 새소리가 깨운다.

 

김성옥-김정근-김창룡으로 이어지는 김씨가문의 소리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과 함께 근대 5명창으로 지목되는 김창룡은 김성옥-김정근-김창룡의 가계로 이어지는 중고소리의 대표적인 맥을 잇고 있다. 판소리사에서 ‘송흥록’에서 시작되는 송씨가문의 소리와, ‘김성옥’에게서 시작되는 김씨가문의 소리는 판소리의 근간을 형성하며 발전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흥록이 우조와 계면조를 비롯한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였고, 그의 매부인 김성옥은 진양조를 창시하였으며, 이것을 송흥록이 완성하였다는 일화가『조선창극사』에 전해진다.

 

“김성옥은 순조시대 인물인데 충청도 강경리 일끗리에서 생장하고, 후에 여산읍에 이거하다가 30세에 조사하였다. 그는 학슬풍에서 좌각이 되어서 수년간 출입을 못하고 병석에 누워서 가곡을 연구하다가 진양조를 발견하였다. 송흥록과 남매간이므로 송이 종종 심방하였다. 어느때 찾아가서 근래는 병세가 어떠하며, 과히 고적하지나 아니한가의 의미의 말을 늦은 중모리로 부르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김은 병석에서 고독의 비애를 몹시 느낀다는 의미의 말을 진양조로 화답하였다. 그때까지는 중모리만 있었고, 진양조는 없었다.(후략)”

 

학슬풍으로 거동을 못하다 30세에 조사(早死)했다는 김성옥의 소리는 아들 김정근이 잇는다. 김정근은 충청도 강경리에서 출생하여 철·고 양대간에 무숙이타령으로 과히 명성이 있었고 <삼궁접>이라는 곡조를 창시하였다 한다(『조선창극사』115쪽). 김정근의 소리는 아들 김창룡·김창진과 이동백, 황호통, 최승학에게 전승되었다.
“조선 소리의 곡조는 김문(金門)에서 거의 다 되다시피 한 것이다”라는『조선창극사』의 언급은 김씨가문 소리가 판소리사에서 갖는 비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성옥과 김정근이 태어났다는 강경 일끗리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그들을 기억하는 이를 찾기도 힘들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김창룡명창이 살았던 충남 서천군 횡산리를 찾았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남 서천군 장항면 성주3리. 서해안 고속도로 서천IC를 나와서 장항 방면으로 가는길(4번과 21번 국도가 함께 감)로 6km 정도 진행하면 4번국도와 21번국도의 갈림길이 있다. 여기서 4번국도 방향으로 1.5km 정도 가면 왼편에 장항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장항초등학교를 끼고 좌회전 후, 다시 학교 뒤편 산을 끼고 난 길로 60여m 들어가면 모정가든 왼편에 대밭이 있다. 빽빽하게 들어선 대밭, 김창룡 명창의 거주지이다. 이곳이 그의 생가라고 알려져 있으나 1937년 매일신보에 실린 김창룡의 회고담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태어났고, 자라기는 서천에서 자랐다”고 전한다(송방송, “김창룡 명창의 음악활동에 대한 문헌적 점검” 『판소리연구13집』255쪽).
옛 명창이 살았던 집은 눈에 보이지 않고, 곧게 솟은 대나무 사이로 잡풀이 무성하다. 옷깃을 여미고 대밭을 헤치고 들어가자 깨진 옹기조각과 돌무더기, 움막처럼 보이는 목조구조물이 보인다. ‘서천군 장항면 성주3리 403번지’, 동행한 이장님(신은섭, 65)에 의하면 이곳이 김창룡명창의 생가라는 말을 들었을 뿐, 그의 얼굴을 보거나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고 한다.

 

김창룡은 1872년 판소리 명가 김씨 가문에서 김정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13세까지 이날치에게 1년 간 수학한 후 오랜 독공의 시간을 갖는다. 원각사가 문을 연 1908년 무렵 상경한 그는 연흥사 창립에 공헌하였고, 협률사 공연에 참여한다. 또한 단성사와 같은 사설극장에서 이동백·심정순과 더불어 판소리를 공연한다. 1915년 ‘경성구파배우조합’에 한성준, 박팔괘 등과 함께 배우로 참여한 이후,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판소리와 창극공연 활동을 펼친다.
1910년 이후의 판소리 공연은 남자판소리 명창이 주를 이루던 이전과는 달리 기생들의 판소리가 많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192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1925년 이후에는 기생조합의 연주회가 사라지고 신문사나 음반사 주최로 명창대회 형식의 공연이 주를 이룬다. 김창룡명창은 이 시기 ‘조선악연구회’와 ‘조선고가무회’ 등에서 공연활동을 펼쳤으며, 1928년에는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일원들과 함께 ‘조선음악협회’를 결성한다.
1930년에는 송만갑과 함께 조선음률협회를 설립하고 활동하였으며, 1933년에 이르러 조선성악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41년 6월까지 후진양성과 공연에 참여한다. 타계하기 한해 전인 1942년에는 ‘조선가무단’과 ‘조선음악단’에 참여하여 활동을 펼친다(백현미,『한국창극사연구』102∼169쪽).
김성옥에서 시작된 판소리는 김정근을 거쳐 김창룡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김창룡의 아우인 김창진은 가문의 소리를 따르지 않고 서편제의 맛을 가미하여 소리했다고 한다. 김창룡의 장남 세준은 1920∼40년대까지 판소리·창극·민요·잡가 등을 부르거나 고수로 활동했으며, 차남 종선과 삼남 대준은 아쟁이나 피리 등을 연주했다. 김세준의 장녀인 김차돈은 조부 김창룡에게는 배우지 않았으나, 이동백, 송만갑, 박초월에게 소리를 배우고, 성금연에게 산조를 배운바 있다(신은주, “김창룡 명창론”, 판소리학회 41차 학술대회 자료집『판소리 명창론』51∼52쪽).

 

김창룡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경성방송국에서 130여 회에 걸쳐 소리를 하였고, 또한 일축, Columbia, Polydor 등의 음반사에서 110여 매의 음반을 녹음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43년 72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그는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과 더불어 암울한 시기 고졸하고 거뜬한 소리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근대 5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자가전래(自家傳來)의 법제를 계승한 만큼 古曲味가 다소 있고, 천품 성대가 좋아 며칠을 계속하더라도 상하지 않는 점은 장하다”는 『조선창극사』의 언급은 그의 소리가 갖는 특징과 묘미를 잘 설명해준다. 튼실한 목으로 조부 김성옥에게서 이어진 김씨일문의 옛소리를 잘 담고 있다는 뜻이다. 선율을 단순하게 사용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엇붙임을 써서 장단으로 소리를 맺고 푸는 것이 아니라, 발성으로 소리를 밀어올려 기복을 만들어낸다는 표현은 김창룡의 소리가 갖는 특징을 잘 설명한다(배연형, “판소리 중고제론”,『판소리연구』5집).
흔적을 찾기도 힘든 옛사람의 집터를 자꾸 돌아보며 빗금뫼(횡산리의 옛 지명)를 나온다. 정작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을 쫓아 내면의 진솔함과 그 멋을 잃어버리는 답사자의 마음새를 돌아보듯 자꾸 머뭇거리며.

 

심정순과 중고제의 마지막 계승자 심화영

 

이동백과 김창룡으로 대표되는 중고제 판소리. 전승이 끊겨 옛 음반으로나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 충청도 땅 김씨일문의 소리와 필적할 예인의 가문 평송 심씨 일가를 찾아 나섰다.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를 나와서 29번 국도를 타고 14km정도, 서산시에 접어든다. 서산의료원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00여m를 가면 석남주공아파트 3단지가 있다. 303동 1106호, 이곳이 심정순 명인의 차녀이자 중고제 마지막 계승자 심화영 집이다. 심화영은 현재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기능보유자이며 판소리, 서도민요, 시조, 가야금을 연주하는 만능 예인이다. 그의 나이 91세. 단정하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고운 얼굴을 대하며, 세월을 거슬러 부친 심정순과 오빠 심재덕, 언니 심매향, 사촌 심상건의 이야기를 듣는다.
판소리명창이자 가야금과 병창 명인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심화영일가의 원적에는 충남 아산군 송악면 외암리 77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심화영은 부친이 서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심정순의 부친 심팔록은 태안에 살다 서산읍 학돌재로 이주해왔으며 피리와 퉁소의 명인이었으며, 슬하에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가야금병창 명인 심상건의 부친이자 가야금산조 명인으로 알려진 심창래, 둘째는 심정순, 셋째는 무명의 농부였다한다(이보형, “심정순의 생애와 예술”, 목원대 한국음악 프로젝트 2000 자료집『심정순의 가계와 한국음악』17쪽).

 

심정순은 김창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08년 원각사 개장 무렵에 상경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연기록에서 심정순의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도 1908년 12월 무렵이다. 서울에서 심정순은 장안사라는 극장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1913년부터는 ‘장안사순업대(長安社巡業隊)’를 이끌고 개성, 의주, 평양, 진남포 등 이북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공연한다(송혜진, “가야금병창 명인 심정순”『음악동아』1988년 5월호, 184쪽). 심정순은 이동백, 김창룡 등과 필적하는 소리꾼이었으며, 공연뿐만 아니라 상당량의 음반을 취입했는데, 1911년 일본축음기상회에서 출반한 14면의 닙보노홍 쪽판이 있고, 1925∼26년의 일축조선소리반 24면이 있다(배연형, “심정순 일가의 음반”『심정순의 가계와 한국음악』25∼28쪽). 녹음된 내용을 보면 판소리, 가야금병창, 가야금연주, 판소리 장단을 망라하고 있어 판소리·가야금·양금·단소·장고 등을 익혔다는 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심정순은 음악적 면모 뿐 만 아니라, 인격적 면모에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혜진이 소개한 바 있는 1914년 3월 4일 매일신보의 기사내용에 의하면, “여러광대중에도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순실하고 은공한 사람은 아마도 누구이던지 심정순의 위인을 첫째로 손꼽을 지라.(후략)”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판소리 사설은 이해조에 의해 1912년 3월 ‘강상련’으로 심청가, 4월 ‘연의 각’으로 흥보가, 6월 ‘토의 간’으로 수궁가가 『매일신보』에 연재된다.

 

1926년경 중풍으로 활동을 중단한 심정순은 이듬해 설상가상으로 장녀 매향을 잃는다. 심매향(1907∼1927)은 부친과 오빠 재덕에게 소리를 병창과 소리를 배워 1920년대 중반 15∼6세의 어린나이로 가야금을 연주하고 병창과 판소리, 민요, 잡가, 가요를 공연하였고 1925년에는 음반을 녹음했다. 심매향의 죽음 후 낙향한 심정순은 1937년 작고하기 전까지 아들 재덕의 율방(律房)에서 병과 싸우며 지인들과 소리를 하고, 풍류를 연주했을 것이다.
심정순 일가는 서산땅에서 율방을 운영했다. 심정순의 부친 심팔록이 연주자였으며, 심정순의 장자 심재덕은 아버지의 율방을 이어받아 주변의 율객들과 교유하며 활동했다. 심화영의 증언에 의하면 퉁소잽이, 피리, 가야금, 양금 잽이들이 모여 하루 두어번씩 꼭 연습을 했다 한다. 또한 박퉁소라 불렀던 퉁소명인이 있었고, 정해시와 같은 명인이 기거하며 재덕에게 양금을 가르쳤으며, 김창룡 명창도 가끔 들러갔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심씨 일가의 율방은 충청지역 전통예술의 중심지였음에 틀림없다.
심정순은 1937년 서산땅에서 6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인근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택지개발로 공동묘지를 이장하던 때에 고인의 유해를 다시 화장했다. 서산시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1993년에 서산문화회관 한켠에 기념비를 세웠다. 서산문화회관은 서산의료원 사거리에서 시청앞 로터리까지 간 후 좌회전, 200m정도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400m쯤 가면 서산문화회관이다. 기념비는 주차장 오른편에 있다.

 

가야금병창 명인 심상건(11889∼1965)은 부친 심창래에게 가야금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심화영의 증언에 의하면 심창래는 음률에 어두워 ‘안방샛님’이라 불렸으며 심상건이 7세 되던 해에 작고했다한다. 심상건은 심정순의 풍류방에 기거하며 가야금과 병창을 배웠다 하니, 결국 심상건의 음악 역시 심정순에게서 비롯된 셈이다.
심화영에게 양금과 판소리를 가르쳤던 오빠 재덕(1889∼1967)은 부친에게 소리를 배웠고 서산에서 율방을 운영하다 1932년 동생 화영과 청진권번으로 간다. 청진권번에서 3년 간, 그리고 1935년부터 1950년까지 진남포에서 국악사범을 한다. 6·25가 이후 정착한 서울에서 그는 국악협회 활동을 하였고,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제 홀로 남은 이, 심화영. 1913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부친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이, 서산에서 모친과 외로운 유년을 보낸다. 18세에 오빠에게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 한바탕, 양금, 승무를 배웠고, 20세에 기녀 이옥화의 소개로 함경도 청진권번으로 가 10년 간 활동한다. 1945년 4월경 낙향한 심화영은 33세에 송씨와 결혼한다.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50대 중반 이후 활동을 재개하였고, 2000년에 충남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올해로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빠 재덕에게 배운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있는 심화영은 판소리와 서도민요, 승무를 서산 땅에서 지금 가르치고 있다. ‘중고제의 마지막 계승자’, 그의 소리는 음반하나 남아있지 않고, 아흔이 넘은 육신의 가슴에 묻혀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화영의 존재를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하고 안타까움을 품는다.
조카 심수봉의 디너쇼에서 부른 ‘쑥대머리’는 그가 간직한 시간의 깊이만큼을 감한 듯 군더더기를 제하였고, 가벼워진 그의 육신만큼 단촐하다. 단지 가슴에 묻은 그 소리가 뒤늦게라도 제자들의 목에 담기기를 바라며, 지극한 겸손과 진솔함이 닿는 예인의 세월을 뒤로하고 잊혀져 가는 옛 소리의 자취를 답사
자의 가슴에 담는다.

 

 

출처: http://210.95.200.119/100_ncktpa/sosik/namwon/2003_spr/1-12.htm